안양대형로펌 ‘24시간 필리버스터’ 장동혁, 다음 단계는? 한동훈 당원게시판 문제 분수령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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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길중 날짜25-12-25 23:14 조회0회 댓글0건본문
한 국민의힘 재선 의원은 24일 통화에서 “장 대표가 필리버스터로 당내 리더십 위기 상황을 돌파했고 극우 지지층을 결집하는 ‘일타쌍피’를 했다”며 “내란전담재판부의 위헌성을 알리겠다는 대국민 메시지 효과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장 대표의 24시간 필리버스터는 당내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내부 정치에 초점이 맞춰진 행보라는 분석이다.
지난 3일 12·3 불법계엄 사과를 거부한 이후 일었던 장 대표에 대한 반발 움직임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 분위기다. 다만 내년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만큼 장 대표의 향후 기조에 따라 반발 기류가 언제든 고개를 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다른 재선 의원은 “장 대표가 당을 쇄신하며 믿고 따라와 달라고 한다면 탄력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필리버스터 하느라 애썼다’ 정도 이상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한 전 대표를 겨냥한 당원게시판 문제를 어떻게 매듭지을지가 향후 당 운영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무감사위원회에서 한 전 대표에 대한 중징계 권고 결정이 나온다면 계파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가운데 한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어제 장 대표가 위헌적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을 막기 위해 장장 24시간 동안 혼신의 힘을 쏟아냈다. 노고 많으셨다”며 “민주당의 폭거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모두 함께 싸우고 지켜내야 할 때”라고 적었다.
‘당심 70% 대 여론조사 30%’ 경선 룰에 대한 장 대표의 입장도 당 기조 변화를 평가할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오는 26일 당 약자와의동행위원회와 서울 도봉구에서 환경미화원 근무를 하고 29일 전남 무안, 30일 전북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절로 ‘픽’하고 웃음이 터지는 지점이 있다.
“꿈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서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다.”(1594년 2월5일)
‘이순신과 여자’와 관련해서 한 두 군데 의심쩍은 일기가 보인다. 하나는 역시 꿈, 다른 하나는 현실 이야기다.
(꿈)“꿈에 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는데, 달수를 계산했더니 낳을 달이 아니어서 꿈이지만 내쫓았다.”(1594년 8월2일)
(현실)“…저녁에 경상 좌수사(이운룡·1562~1610)와 작별 술잔을 나누고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와 함께….”(1596년 3월9일)
■이순신의 흉중
이 두 사례를 두고 ‘설’이 많다. 우선 꿈에 나타난 ‘부안사람(扶安人)’을 장군의 첩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알 수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순신의 ‘확실한 첩’은 서자 훈(1574~1624)을 낳은 해주 오씨 뿐이기 때문이다.
또 술에 취해 ‘함께 한 개(介與之共)’을 두고 “(여자 종인) 개와 함께 잤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함께(共)’를 ‘여자와 잤다’고 이해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여색을 멀리했다는 정황 자료가 남아있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이순신은 7년간 군중에 있으면서 마음 고생하고 몸이 피로했으므로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통제사 이공 유사>)고 했다. 꿈에서도 미인의 유혹을 뿌리쳤을 정도로….
웬 객쩍은 소리냐 할 수도 있겠다. 지금 ‘우리들의 이순신’ 특별전(~2026년 3월3일)을 열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기획자의 강조점이 ‘위기의 순간을 견디고 일어선 우리가 곧 이순신이다’라는 구호이다. 패배와 좌절, 압도적인 위기 앞에서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고뇌, 또 다시 일어서려는 결단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난중일기> 등에 담겨있는 ‘인간 이순신의 내면과 감정’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이중 필자는 인간 이순신의 ‘흉중(마음 속)을 날 것 그대로’ 써내려간 <난중일기>에 초점을 맞춰본다.
<난중일기>를 언급할 때 빼놓지 않은 소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순신의 ‘지독한 원균 뒷담화’이다.
“원균(1540~1597)의 술주정에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니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1593년 5월 14일)
“왜적을 토벌하겠다는 공문을 보냈더니 원균은 ‘술에 취해 정신이 없다’고 핑계대면서 대답이 없었다.”(1593년 6월11일)
“원균이 잔뜩 취해서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했다. 해괴 했다.”(1593년 8월 26일)
“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고… 뇌물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아 있다. 그렇게 나를 헐뜯으니…”(1597년 5월 8일)
■‘탈탈 털린’ 개인일기
그런데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원균 뿐 아니라 다른 장수들도 이순신에게 사정없이 욕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원수(권율·1537~1599)가 근거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이 많았는데 그런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1595년 4월30일), “우수사(이억기·1561~1597)는 …헛소리를 많이 하며…”(3월24일), “경상수백(권준·1547~1611)이 모함하는 말을 거짓으로 꾸몄다.”(10월21일), “남해현령 기효근(1542~1597)은 어린 계집을 배에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했다.”(1593년 5월30일)는 등….
이순신은 또 “체찰사(로 파견된) 이원익(1547~1634)의 계책이 얼마나 쓸모없냐. 우스운 일이다. 조정이 세운 계책이 어찌 이럴까”(1596년 2월28일)하고 개탄했다.
순변사 이일(1538~1601)은 이순신의 꿈에까지 나타나 장군에게 욕을 먹었다.
“꿈에 이일과 만나…‘당신은 국난을 맞아…배짱좋게 음란한 계집이나 끼고…비웃음을 사고 있으니 어떠냐’고 따졌다….”(1594년 11월25일)
그렇다면 이순신은 ‘모두까기’였을까.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난중일기>는 그날그날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담은 ‘개인일기’일 뿐이다.
다른 사람 보라고 다듬고 포장할 리 없다. 만일 400여 년 뒤 자신의 일기가 ‘탈탈 털린’ 이순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개인정보가 저렇게 까발린 것에 한없는 분노와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반목은 반목, 협력은 협력…
다른 이들이야 그렇다 치고 이순신과 원균(1540~1597)은 유독 ‘견원지간’이었다.
그렇지만 왜군과의 전투에서는 내남이 있을 수 없었다. 이순신-원균 등과 이억기(전라 우수사·1561~1597) 등 3대장은 수시로 만나 작전회의를 했다.
이순신은 “영남 원수(원균)가 왜군 300여 명의 머리를 베어 죽였다”면서 “아주 기쁘다”고 자기일처럼 좋아했다.(1594년 1월24일)
3일 뒤인 27일자는 “원균 수사의 군관이 제주 판관의 편지와 말 장식, 해산물, 감귤, 유자 등을 보내왔다. 어머니께 보냈다”고 했다.
2월13일에는 “‘적선 출몰’ 보고를 받고 원균과 상의토록 했다”고도 했다. 또 1596년 윤8월22일에는 “(당시 불화와 갈등 때문에) 전라병사로 좌천(?)된 원균을 전라 병영(강진)에서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꿈에 원균이 나타나…
또 칠천량 해전(1597년 7월15일)을 8일 앞두고 꾼 이순신의 ‘원균 꿈’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이었다. 쫓겨났던 이순신이 옥에서 겨우 나와 백의종군하던 때였다.
그때 이순신의 꿈에 원균이 나타났다.
“원공(원균)과 함께 있을 때 나(이순신)는 원공의 윗 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내올 때 원공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7월7일)
꿈이 맞다면 곧 다가올 칠천량 패전을 예감한 원균이 조선의 바다를 이순신에게 맡기고 기꺼이 전사했던 것이 아닐까.
꿈은 현실이 되었다. 16일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 같다”면서 통곡했다. 이순신은 보름 뒤인 8월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하라”는 선조의 정식 교서를 받았다. .
■아픈 내색도 사치
또 하나 <난중일기>를 읽으면 이순신은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온통 나라 걱정 뿐이었다. <난중일기> 1593년 5월16일자는 “내가 몸이 아주 불편해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프다는 내색은 사치였다.
“명나라군의 진격이 늦어지고 소식을 들었다. 나라 걱정이 많다…더욱 더 탄식이 일어나 펑펑 쏟아지는 눈물에 잠길 뿐이다.”
아무리 아파도 결코 진중을 비울 수 없었다. 게다가 동료 장수와 부하들과의 소통을 위해 술자리를 걸러서도 안되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조정에 올리는 보고서를 직접 써야 했고, 또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1594년 3월과, 1596년 2~5월 사이 이순신은 역병(전염병)에 걸려 몸상태가 최악이었다.
예컨대 1594년 3월6~25일 사이 “몸이 괴로워 앉고 눕기도 불편하며, 하루종일 무리가 무겁고 신음했다”는 등의 기사가 줄을 잇는다. 3월6일 이순신은 “몸이 몹시 괴로워 앉기도, 눕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쉴 수 없었다.
청슬(거제시 지석리)에 출몰한 적선 40여척을 불태웠다는 보고를 받고 역풍을 무릅쓰고 흉도(거제도)까지 가야 했다. 그때 명나라 장수 담종인이 통지문을 보내왔다. ‘명나라-일본 간 강화 협상에 방해가 되니 왜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문서였다.
억장이 무너지는 통지문이었다. 답서를 써야 했지만 병중의 이순신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부하들을 시켰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이순신 본인이 억지로 병든 몸을 이끌고 앉아 글을 썼다.(1594년 3월7일) 이순신은 답서에서 “왜적의 점거 지역은 모두 조선 땅인데 왜 공격하지 말라는 거냐”면서 “강화 하자는 것은 일본군의 속임과 거짓”이라고 우회적으로 거부했다.
병중에 발휘한 투혼의 답서라 할 수 있다.
이순신은 또 1596년 3~5월 무려 2개월 이상 끙끙 앓았다. 거의 매일같이 ‘땀이 온몸을 적시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곽란 때문에 구토했다’는 등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예컨대 “낮에는 땀이 옷에만 배더니 밤에는 두 겹이 다 젖고 다시 방바닥까지 흘렀다”(3월25일)고 했다. 습열 때문에 온몸에 침을 20여곳이나 맞기도 했다.(4월19일) 몸이 불편해서 하루에 두번이나 구토했다.(5월8일)
■20시간 근무, ‘몸 혹사’
그런 상황에서도 소통을 위한 술자리는 거를 수 없었다. 몸이 아파 땀이 줄줄 흐르고 있던 1596년 3월 5일의 술자리가 그랬다.
이날 이순신은 5경(새벽 3~5시) 무렵 배를 출발해서 동틀 무렵 우수사(이억기)가 복병하고 있던 견내량(거제대교 아래 해협)에 도착했다.
그는 이억기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소한 오해를 푼 뒤 술자리를 마련했다. 이후 일찍부터 만취한 이순신이었지만 그냥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전라 우수영 우후(정4품) 이정충의 장막(꽃나무 아래)에 들러 이야기를 나눈 뒤 술에 취해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이순신은 몸을 추슬러 겨우 지휘부로 돌아왔다.
다시 부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삼경(밤 11~새벽 1시)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지금 시간으로 계산하면 하루 24시간 중 대략 20시간(새벽4~밤 12시)이다. 그 정도로 몸을 혹사했다.
■‘나라의 치욕을 씻으라’
진중과 배 안에서 그러한 극한상황을 버틴 이순신을 버티게 한 힘은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난중일기>에 녹아있는 이순신의 효심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난중일기>의 첫날(1592년 1월1일) 내용이 “어머니를 떠나 설 두 번을 쇠니 간절한 회안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아침에 흰 머리카락 10여 가닥을 뽑았다…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1593년 6월12일)
이순신은 어머니(초계 변씨·1515~1597)를 ‘천지(天只·하늘)’라 일컬었다. ‘어머니는 하늘(母也天只)’이라는 <시경>(‘용풍·백주’) 구절에서 따왔다.
“어머니 생신이다.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찾아뵙고 장수를 기원하는 술 잔을 올릴 수 없다. 평생의 한이 되겠구나.”(1593년 5월4일)
1594년 1월11일의 일기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날 새배를 드리려고 찾아뵌 어머니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큰소리로 불렀더니 어머니가 놀라 깨어 일어났다. 깜짝 놀란 이순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가) 숨이 곧 끊어지실 듯 해가 서산에 이른 듯 했다. 남몰래 눈물만 펑펑 흘릴 뿐이다.(只下隱淚)”
하지만 “적을 무찌를 일이 급해 오래 머물 수 없었다”고 했다. 겨우 하룻밤 어머니와 지낸 뒤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이때 어머니의 말씀이 심금을 울린다.
“잘 가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大雪國辱)”(1594년 1월12일)
이 대목에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선생(1862~1927)이 떠오른다.
조마리아 선생은 1910년 2월14일 아들이 사형언도를 받자 혹시나 항소할까봐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를 향한 효도”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과연 한국 역사의 두 불세출의 영웅을 낳은 어머니들은 뭔가 다르지 않은가.
■하늘이 무너졌다
이순신은 1596년 윤8월12일 노환으로 기력을 잃어가던 어머니를 뵈러 도착했다. 그때가 밤 10시였다.
“어머니는…숨이 곧 끊어질 듯 하루도 버티기 어려우신 듯…펑펑 쏟아지려는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부여잡았다. 밤새 위안하며 기쁘게 해드렸다.”
어머니 변씨는 이듬해인 1597년 4월13일 타계했다. 83살로 당시로서는 장수한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천지(天只), 곧 하늘(어머니)이 무너진 것이다. 마침 백의종군 길에 오르던 이순신이 잠시 아산에 머무르고 있던 때였다.
어머니의 안부를 물으려 갔던 사내종이 돌아와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이었다.
“어머니의 부음에 나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퍼했다. 하늘의 해도 까맣게 변했다…서러움에 찢어지는 아픔 마음으로 다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도 못하고 금부도사에게 이끌려 길을 떠나야 했다.
“갈 시간이 되어 어머니의 신위에 인사를 올렸다. 목놓아 울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죽느니만도 못하다.”(4월19일)
■코피를 쏟은 이유
이순신은 막내아들 이면(1577~1597)을 가슴에 묻었다. 명량대첩(1597년 9월16일) 직후인 10월14일의 일이었다.
저녁 때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느낌이 ‘싸’ 했다. 봉투를 채 뜯지도 않았는데, 뼈와 살이 먼저 떨렸다.
마음이 ‘아찔’ 하고 어지러웠다. 겉봉투를 와락 펼쳤더니 ‘통곡’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간담이 떨어졌다. 목놓아 소리 높여 슬피 울부짖었다. 하늘은 어찌 이토록 모진가…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하늘이 정한 이치 아니더냐. 하늘과 땅이 깜깜하고 한낮의 해도 빛이 바랬다.”
하지만 부하들 앞에서 목놓아 울 수 없었다. 이순신은 “외딴 곳 소금 굽는 집에 가서 마음껏 큰소리로 서럽게 울부짖었다”고 토로했다.
아들 전사 후 5일이 지난 19일의 <난중일기>도 심금을 울린다.
“나는 죽은 아들이 그리워 통곡했다. 어두울 무렵 코피가 한 되 남짓 쏟아졌다. 그리움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와중에도 전투가 벌어졌다. 예컨대 이순신이 ‘소금 굽는 곳에서 통곡한 날’ <난중일기>는 “적의 머리 13급과 적에게 투항한 자(조선인)의 머리를 베어왔다”고 기록했다.
또 ‘죽은 아들이 그리워 서럽게 울었다’는 19일자 일기에는 “적에게 부역했던 2명을 잡아왔다”는 구절이 보인다. 전쟁의 비극이 이렇게 한 날짜의 일기에 적나라하게 투영되어 있다.
<난중일기>엔 부인(상주 방씨)에 대한 언급이 6번 정도 등장한다. 그러나 나라 걱정 때문에 절절한 그리움을 표할 수도 없음을 채찍질했다.
“아내의 병세가 아주 위중하다는 소식을 받았다…나랏일이 이러니 다른 일은 걱정도 할 수 없구나….”(1594년 8월30일)
그렇지만 이순신은 이날 밤새 뒤척였다. 결국 새벽에 점을 쳐서 불안을 달랬고, 그 결과 모든 점궤가 좋아 그제서야 안심했다.(9월1일)
■‘시인’ 이순신
<난중일기>에는 무인(武人)이 아니라 시인 이순신의 면모가 물씬 풍긴다.
그중 이동하는 장면을 두고 ‘지는 해를 탔다’(乘暮·1596년 4월13일), ‘어둠을 탔다’(乘昏·1597년 11월2일), ’석양을 탔다‘(乘夕·1592년 2월12일)는 등의 표현을 썼다. 특히 ‘참혹한 전쟁터의 모습’을 묘사한 뒤 ‘달을 타고 옮겨 정박했다’(乘月移泊·1598년 9월19일)은 구절은 어떠한가.
또 “일행이 꽃비(花雨)에 젖었다.”(1592년 2월23일)는 얼마나 공감각적인가. 이외에도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쳤다. 자려고 해도 잠들 수 없었다. 닭이 울 때야 풋잠이 들었다.”(1593년 5월13일)는 구절을 보라. 그 뿐인가. 같은 해 8월17일에는 “달빛은 낮과 같이 밝았다, 출렁이는 물빛은 하얀 비단 같았다.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했다. 1594년 5월9일에 읊은 시는 또 어떠한가.
“…빈 정자에 홀로 앉아 ‘가슴을 치는 백가지 생각’을 토로하며 ‘술에 취한 듯, 꿈 속인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 했다.”
구구절절 주옥같은 시어이다. 그렇지만 <난중일기>를 관통하는 구절은 따로 있다.
명랑해전을 하루 앞 둔 이순신의 결기에 찬 한마디….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한 사람이 좁은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1597년 9월15일)
인간 이순신의 삶을 집약한 이 한마디가 오늘의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그래서 이 어려운 때 우리는 외칠 수 있다. ‘우리가 이순신이다.’(2011년 8월11일 이후 14년 5개월 가량 진행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칼럼이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이순신, <난중일기>, 노승석 교감, 민음사, 2013
이순신, <난중일기>, 박종평 옮김, 글항아리, 2018
서윤희·유새롬·임혜경 외, <우리들의 이순신> 특별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25
유새롬, ‘이순신의 마음을 담은 기록, 난중일기’, <우리들의 이순신> 특별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25
신병주, ‘난중일기 속 인간 이순신, 장군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과 한국 해양>4호,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2017
박경식, ‘이순신의 진중생활에 관한 연구 2’, <이순신연구논총> 8권1호,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2007
장시광, ‘난중일기 속에 나타난 이순신의 일상인으로서의 면모’, <온지논총>20, 2008
국가유산청 현충사관리소, <충무공유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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